새민족교회 역사

1. 얼터너티브 교회

새민족교회는 1986년 8월 홍성현 목사 자택에서 출발(서명철 담임전도사, 홍성현 설교목사)했습니다.

홍성현 목사를 비롯한 예장통합 목회자들은 시대와 역사의 고난에 담을 쌓고, 자체확대 재생산에만 몰두 하는 한국교회를 비판하며 신학적 담론을 펴나가면서 바람막이도 되고, 목회자의 소양도 펼칠 수 있는 마당이라는 대안적 교회로서 새민족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새민족'이라는 이름은 에베소서 말씀(공동번역)에서 가져왔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엡 2:15b 새번역)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고 새민족 안에서 하나가 되듯이"(엡 2:156 공동번역) 새 민족은 모든 민족을 넘어서 예수에 대한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된 새로운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신앙을 갖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출신, 민족, 성별, 성적지향, 장애여부, 이런 것들을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혈민족주의를 넘어서 새로운 민족이 되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라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2. 쫓겨난 사람들의 교회

1988년 6월 19일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지태환씨가 백골단의 폭력으로 부상당한 친구를 돕기 위해 교인 들에게 인쇄물을 배포하던 중 사복경찰 20여 명이 교회 안으로 난입하여 난동을 부른 사건이 있었습니 다. 이를 계기로 새문안교회 장로들은 청년회와 대학생회의 정치적 활동, 즉 군사정권을 비판하는 회지를 문제 삼아 청년회와 대학생회를 해체했습니다. 쫓겨난 청년들은 새문안교회 마당에서 예배를 드리며 저 항했지만 당회는 청년들의 복귀를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한편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일하고 있던 이근복 목사는 영등포 노회에 의해서 쫓겨나게 됩니다. 89년 마 포구의 한 맞벌이 부부가 아이를 집에 두고 일하러 나간 사이 화재가 나서 아이들이 죽은 사건이 있었는 데, 당시 여성단체들은 추모행사를 산선 강당에서 진행했습니다. 평소 산업선교를 눈에 가시로 여기던 근 본주의 장로 임원들은 산선 강당에서 열렸던 생명을 추모하는 진혼굿을 트집 잡아 이근복 총무의 목사직 을 일사천리로 권고 사임 처리했습니다.

이근복 목사와 쫓겨난 새문안교회 청년회는 안나서 1991년 다함교회라는 이름으로 공동체를 시작했습 니다. 1992년 이근복 목사는 김형태 목사(당시 새민족교회 설교목사)와의 만남을 통해서 새민족교회와 다함교회를 새민족교회라는 이름으로 통합을 추진했고 새 예배공간을 찾고 있던 다함교회와 교회 운영 에 어려움이 있던 새민족교회는 새로운 활력을 얻으며 통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