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기도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여라

(누가복음 11:2b)

우리 새민족교회가 혈연과 출신을 넘어 새로운 가족의 결속을 맺어가는 요즘입니다. 을사년에도 우리 새민족 가족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의 동행이 충만하길 빕니다. 특별히 올해는 기도하는 한 해를 보내면 어떨까 합니다. 세계 대전 이후 유신론이 완전히 무너졌을 때 오히려 신론은 역동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나온 이신론으로 빠지기도 했고, 또 신은 불안과 두려움의 투사(投射. projection)라는 무신론이 조명을 받기도 했습니다. 서구 신학 안에서도 이제 범신론과 범재신론이 발전하면서 신에 대한 인식이 이제는 절대적 타자에서 내재적인 힘으로 전환되기도 했습니다. 이제 타자화된 신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아무리 하나님께 백 마디의 말을 걸어도, 그리고 아무리 큰소리의 방언으로 외칠지라도 고요한 침묵만이 흐를 뿐입니다. 우리의 말을 듣거나 행위를 보시고,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은 이제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 대신 이웃을 사랑하거나 열심히 존재하자고 성공회의 어느 주교는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보수적인 사람들은 이 모든 신학의 발전을 거부하고, 아직도 열심히 허공에 돌아오지 않는 기도문을 내뱉고 있으며, 진보적인 사람들은 입술을 닫고, 명상이나 독서로 기도를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침묵기도가 내면의 평화를 만들어낼 수는 있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세상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어느날 강도를 만나 남편과 아들을 잃은 한 여인이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자, 신부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순간에 기도할 수 있습니까?” 신을 원망하고 부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도하는 여인을 보고 신부는 놀란 것입니다. 여인이 대답합니다. “그러면 내가 이 상황에서 기도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여인의 기도는 이제 기도 대신 ‘존재’하자는 주교의 제안을 부끄럽게 합니다. 재난과 어려움에 빠지고, 불평등과 가난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마음 대로 존재할 수도, 사랑하기도 힘이 듭니다. 그들은 침묵과 명상 안에서 평정심을 찾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본래 침묵기도, 말하지 않고 듣는 기도 또한 결국 예언자적으로 세상을 향해 말하고 행동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는 말하지 않고서는 기도할 수 없고, 기도하지 않고서는 진정 하나님의 뜻 안에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해야 할까요? 우리는 유신론을 넘어서 신 죽음의 신학을 품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무신론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는 실제로 유신론자였을지 몰라도 참으로 무신론적으로 살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아무리 자신의 기도 안에서 “아버지!” 이렇게 타자화된 하나님을 불렀을지라도 결국 그것은 자기 밖에 존재하는 신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언어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 위의 예수가 밤새도록 하나님께 말을 걸며 십자가를 거부했을지라도 결국 그 어둠의 기도는 주님께서 비추는 한 줄기 빛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그날 밤 예수가 만일 하나님을 부르며 십자가를 거부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면 그는 두려운 마음으로 골고다에 올랐을 것입니다.


오히려 두려운 마음을 하나님께 풀어놓으며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기에 그는 결국 담대하게 골고다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적 타자의 신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하나님 부르는 일을 그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을 뛰어넘는 종교적이고 예술적인 능력을 스스로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더욱 진실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처음에는 나에게 닥친 역경을 거부하거나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으로 기도가 길을 잃을지라도 그 어둠 안에서 한 줄기 빛을 구하는 인내의 기도는 결국 우리를 주님의 경륜으로 인도합니다. 그 기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믿음으로 무장하고 더욱 담대한 마음으로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기도 대신 명상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실한 기도를 드리는 사람만이 결국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 새민족교회는 모든 생명이 본래의 숨을 찾도록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선교적이며 목회의 방향은 안으로부터 바깥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 불변의 목회 방향 안에서 우리 모두가 진실한 기도를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언어를 잃은 이들은 그 언어를 되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깥에 있는 허공, 우주 저편 어딘가에 던지는 말들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하나님, 끊임없이 나를 선으로 유혹하고 설득하고 계셨던 그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언어를 우리의 입술로 말하게 된다면, 우리의 예배는 더욱 풍성해지고, 갈증은 이 안에서 해갈될 것입니다.

우리 기도에 가난에 대한 분석과 해결책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진실한 신음이 담기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신음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소수자들의 현재 상황과 나아갈 방안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를 통해 그 눈물의 의미를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계 정세와 한국 정치와 남북 상황이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절망하는 이들의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기도 안에서 하나님을 마주하게 된 사람들은 해야 할 말과 행동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지혜가 생기고,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우리 올해는 기도하는 새민족교회가 되어서 세상을 바꾸는 투쟁으로 담대하게 나아갑시다.